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충연 반혁명 사건 (문단 편집) == 후일담 == [[https://news.joins.com/article/1014981|원충연·박인도엔 사형. 1965년 12월 23일 중앙일보]] 주모자 원충연은 감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복역 중 1981년 출범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부에 의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는 지난 정부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격하를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차원으로 보인다. 원충연은 이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2004년 생을 마감했다. 밀고자 이상열은 그 대가로 1966년 대령, 1967년 준장, 1969년에는 소장으로 고속 진급하는 출세 코스를 탔으며 1970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관 무관으로 부임했다가 1971년 예편 후 아예 외교관으로 전업한다. 그는 이후에도 한국 현대사의 격동에 또 다시 이름을 올렸는데 프랑스 공사로 재직 중이던 1979년 [[김형욱 실종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6년 사망했고 죽을 때까지 원충연 사건이나 김형욱 사건에 대한 증언을 따로 남기지 않았다. 안치용 기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상열의 외교관 전업에 대해 국내에 남아 있을 경우 원충연 사건 가담자들 혹은 그 후손들에 의한 보복을 우려하여 국내를 떠나 외교관 생활을 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안치용, 시크릿 오브 코리아(타커스. 2012)] 다만 이 내용이 나오는 부분이 원충연 사건을 전담하는 파트가 아니고 차지철의 동생 차상철이 미국에서 살해당한 사건에 결부되어 과거 군사정권 시절 인물들의 다수가 정권이 바뀐 후 미국 등으로 망명성 이민을 떠난 것을 이야기하며 곁다리로 언급한 정도다. 실제 이상열은 외교관 생활 중에도 중간에 중앙정보부에 기용되어 국내 복귀도 했고 은퇴 후에는 한국에서 살았다. 윤필용은 전격적으로 이 사건을 수사 및 해결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는데 이후 [[1.21 사태]]로 경질되어 잠시 부침을 겪고 나서 재기하였으나 [[윤필용 사건]]으로 몰락했다. 원충연의 사후 그의 아들은 아버지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명백히 쿠데타가 맞다고 보아서 1심에서 사형이 징역 17년으로, 2심에서 다시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을 뿐이고 대법원은 2020년 6월 30일 징역 15년의 원심을 최종 확정지었다.[[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630500074&wlog_tag3=daum|#]] 원충연의 복역기간이 1965년 5월 7일 체포 이후 특사로 석방된 1981년 3월 3일까지로 15년 살짝 넘으니 실제 복역기간에 맞추어 형량이 선고된 셈. 그 밖의 주요 가담자들도 길게는 15년에서 짧게는 5년 남짓한 징역 생활을 하고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는 아무래도 반란군 출신이니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요시찰 대상이 되긴 했지만 유신 시절 쥐도새도 모르게 실종되고 의문사당하던 걸 생각하면 정권 초기에 대놓고 반란을 모의하다 붙잡힌 결과로는 생각보다 평온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주요 가담자 중 무죄를 선고받은 문원석 대령은 이후 금융기업에 취직하여 활동했다.[[https://news.joins.com/article/170811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